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커트 코베인 (문단 편집) === 유년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121822b-21cf-44bf-880a-f7cf5360bdea_dam-urlbndacm.jpg|width=100%]]}}} || ||<#000> '''{{{#fcb81e 태어난 지 9시간 된 커트 코베인을 안고 있는 그의 아버지 도널드 코베인}}}''' || [[1967년]] [[2월 20일]], [[미국]] [[워싱턴 주]] 에버딘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스스로도 '중산층인 척 하는 [[화이트 트래시]][* 백인 하류층을 뜻하는 말. 대표적 사례로는 미국의 전설적인 래퍼 [[에미넴]]을 들 수 있다.]'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아버지의 직업은 자동차 정비공이고 어머니는 웨이트리스였다. 코베인의 전기를 집필한 작가는 전기의 후기에서 그의 [[워싱턴 주]] 애버딘 생가를 취재한 뒤 '비교적 가난하다고 알려진 [[엘비스 프레슬리]]의 집도 커트 코베인의 집에 비하니 대궐같다'는 표현을 했을 정도였다.[* 후에 너바나의 다큐멘터리 영화 '몽타쥬 오브 헥'의 어머니 웬디 인터뷰에 따르면 결혼 당시 어렸던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을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않았고, 결혼 후에도 가능한 한 빨리 아이를 가지기를 원했다고 한다.] 커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어머니]] 웬디는 19살, [[아버지]] 돈 코베인은 21살에 불과했고 3년뒤에 여동생인 킴벌리가 태어난다.[* 킴벌리는 커트가 매우 아끼는 여동생이었고 킴벌리도 오빠와의 관계가 좋았다. 참고로 킴벌리는 동성애자로 레즈비언이다. 그래서 동성애와 낙태에 찬성하던 너바나 멤버들도 이 사실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다. 킴벌리는 커트의 딸인 프란시스와도 관계가 좋은데 커트의 아내 코트니가 마약 중독과 정신질환으로 인해 딸을 제대로 키우지 못할때 프란시스에 대한 양육권을 자신이 가지고 프란시스를 자신의 딸처럼 아끼며 키웠기 때문이다. 프란시스에게는 어머니와도 같은 고모인 셈.] 커트의 이모에 따르면 커트는 2살 때부터 노래를 부르고 4살 땐 피아노를 연주하며 작곡도 했다고 한다. 물론 대단한 노래는 아니었지만 목소리가 무척 예뻤으며 녹음을 안 한 게 무척 아쉬웠다고. 그러나 [[부모님]]은 커트가 9살 되던 해에 잦은 마찰과 다툼으로 인해 불화가 커져[* 근본적인 원인은 금전 문제 때문이었는데 양측의 부모가 동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커트의 부모가 준비도 없이 성급하게 결혼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이혼하게 된다. 부모님의 이혼 후 코베인은 아버지를 증오하였고[* 왜냐면 아버지가 재혼하지 않겠다고 말하고선 재혼하여 자식을 둘이나 가졌고 그가 아끼는 여동생 킴벌리를 데려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죽을 때까지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46673d75f946b9c53c8edd23e232d3c.jpg|width=100%]]}}} || ||<#000> '''{{{#fcb81e 어린 시절 가족 사진}}}''' || 그의 우울증은 선천적인 영향과 후천적인 영향 둘 다에 기인한다고 보는 게 맞는다.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적인 건강 문제는 그의 양가에 두루 존재하였으며 그의 친척들 중 몇 명은 자살을 기도했거나 혹은 그것이 원인이 되어 2명이 자살하였다. 그의 외증조부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해]]를 하다가 병원에서 죽었으며 다른 두 명의 삼촌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커트 코베인에게 자살과 우울증은 그리 먼 대상이 아니였던 것이다. 사실 그와 함께 밴드를 꾸려온 멤버들과 올림피아 그리고 시애틀의 록 씬 대부분의 펑크 로커들은 커트처럼 가난했고 이혼으로 얼룩진 인생을 헤쳐나왔다. 당장 절친이자 [[너바나(밴드)|같은 밴드]]에 속해 있던 [[크리스 노보셀릭]]도 부모의 이혼으로 얼룩진 과거를 가지고 있다. 불우한 가정환경은 사실 그 바닥에서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인터뷰 중 기자가 커트 코베인에게 '스스로의 인생이 슬프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커트는 "자신은 그저 미국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산물일 뿐이다."라고 대답했던 적도 있다. 그의 사진집 겸 기록물인 'Cobain unseen'에서는 어렸을 때 동네 친구의 형이 산속에서 목을 매 자살한 시체를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들이 현장에 올 때까지 몇 십분 동안이나 그 기괴한 현장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선천적으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그의 성격, 불우한 가정환경, 이러한 충격적 장면을 본 기억의 잔재 등이 그의 곡이나 특히 가사에 많이 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의 재혼과 바람기로 인해[* 재혼했는데도 남자친구를 수도없이 사귈 정도로 문란한 성격이었다.] 사이가 나빠 매일 싸웠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고 재혼한 어머니의 양부와도 사이가 나빴으며 양부가 어머니와 커트에게 가정폭력을 일삼아[* 양부의 폭행으로 팔이 부러져 커트가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양부는 나중에 어머니와 커트를 심하게 폭행하여 결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감옥에 가면서 이혼당했다.] 가출하기도 했으며 가출한 동안에는 친척과 친구 집을 돌아다니며 살기도 하고 노숙을 하기도 했다.[* "Something In The way"의 노랫말은 내가 만약 가출했을 때 다리 밑에서 살았다면 이렇게 살았을 거라고 상상하며 썼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학교폭력|급우들에게 폭력을 일삼고]] 대마초를 피웠기 때문에 [[비행 청소년|양아치]]라며 선생님들에게 배척받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청소년 시절부터 그는 [[대마초]], [[술]], [[담배]] 등에 빠져서 심각한 중독 수준에 이르렀고,[* 시간이 지나서 너바나를 결성한 1987년 무렵부터는 [[헤로인]]까지도 손댔다. 그러나 [[평전]]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은 그리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게 아니었기 때문에 너바나가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헤로인이나 코카인을 그리 쉽게 접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동시에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가 차차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처음 배운 악기는 [[드럼]]이었다고 한다. 생전 커트는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였는지 혹은 특별히 의도했는지 몰라도 인터뷰에서 본인의 성장 이야기를 말할 때 사실과 허구를 섞어서 모호하게 표현하곤 했으며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 중에는 사실이 아닌 것들도 일부 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